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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편 수성의 인물
suseong | 2011-07-21 17:05:04

제3편 수성의 인물

수성지역은 사람이 살기시작한 역사가 오래된 만큼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을 것이다. 또한 이 지역에서 활동한 인물들도 숱하게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문헌에 남아있지않은 인물들에대해서는 알 수없기 때문에 여기에서 소개하는 인물은 기록을 근거로 이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했던 경우에 국한될 수밖에 없다.

*신라시대

1)이재(異才)=신라말(AD900년 수창군(현 수성구지역)지역의 호국성(護國城)을 근거로 이 지역을 다스렸던 독립성이 강한 친신라계 호족으로 스스로“호국의영도장 중알찬(護國義營都將 重閼粲)”이라 칭했다. 문헌상 나타나는 최초의 수성지역 유력인으로 서기908년 수창군의 남령(南嶺)에 나라의 경사를 빌고 전쟁의 화를 물리치기위해 팔각등루(八角燈樓)를 세웠던 사실이 당대의 대학자인 최치원(崔致遠)이 쓴 <新羅 壽昌䐃 護國城 八角燈樓記>에 기록돼있다. 그는 불교를 믿는 마음이 두터웠고 팔각등루를 건립하고 베푼 제에는 동화사의 홍순대덕(弘順大德)을 좌주로 전국의 고승을 청했을 만큼 위상이 대단했다. 그러나 그의 생몰년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2)일연(一然)=1206년에 장산군(지금의 경산시로 현 고산지역이 여기 속해있었음)에서 긴언정(金彦鼎)의 아들로 태어나 1289년 6월 군위 인각사(麟角寺)에서 입적했다. 처음 법명은 견명(見明)이었으나 뒤에 일연으로 고쳤다. 자는 회연(晦然),자호는 효암(曉庵)이다. 1214년 해양(海陽) 무량사(無量寺)에서 학문을 닦았고 1219년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 들어가 출가 고승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었다. 이후 여러곳의 선문을 방문하며 수행했고 주위의 추대로 구산문(九山門) 사선(四選)의 으뜸이 되었다. 1227년에 승과의 선불장(選佛場)에 응시하여 장원인 상상과(上上科)에 합격하였다.

그후 대구의 남쪽 비슬산의 보당암(寶幢庵)에 주석하면서 참선에 몰두하면서부터 수성지역민들에게도 많은 정신적 영향을 끼쳤다. 1223년이래 몽고의 침입이 계속되자 문수(文殊의 오자주(五字呪)를 염하며 감응을 빌자 문수가 현신하여 “무주(無住)에 있다가 다음해 여름에 이 산의 묘문암(妙門庵)에 거쳐하라”고 가르쳐주어 보당암의 북쪽인 무주암(無住庵)에 거처를 옮겼다고 전한다. 그곳에서 수행중 국가로부터 삼중대사에 임명되었고 1246년에 다시 선사로 임명되었다. 3년뒤 참지정사(參知政事) 정안(鄭晏)의 요청을 받아 남해의 정림사(定林寺)로 옮겨가 3년간 머물면서 대장경 제작에 참여했다.

1256년 윤산(輪山)의 길상사(吉祥寺)에 머물면서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2권을 짓고 3년후 대선사에 올랐다.1261년 왕명에 의해 수도인 강화도로 옮겨 선월사(禪月寺)에 머물면서 국가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이 시기에 지눌의 사상을 계승하려했다. 3년후 왕에게 청하여 경상도 영일군 운제산(雲梯山)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비슬산 인홍사(仁弘寺)주지가 되었다.

1274년 인홍사를 중수하면서 조정에 절 이름을 인흥사로 고치고 왕의 친필을 요청했고 왕은 인흥(仁興)이란 편액을 내려주었다. 그 시기 비슬산의 용천사(湧泉寺)도 중창하고 이름을 불일사(佛日社)로 바꾸었다. 1277년에는 왕명으로 청도 운문사에 주석하며 선풍을 크게 일으켰다. 1281년 여원연합군(麗元聯合軍)이 일본정벌에 나섰을 때 왕이 이를 사열하기위해 경주에 행차하자 일연도 왕을 수종하였고 다음해에는 개경에 머물면서 궁궐내에서 국가와 국왕을 위해 설법을 베풀었다. 이 때 국존(國尊)에 책봉되어 원경충조(圓徑冲照)라는 호를 하사받았다. 그러나 노모의 봉양을 이유로 국존을 사양하고 군위의 인각사(麟角寺)에 들어갔는데 나라에서는 이 절을 수리하고 토지 100결을 하사해 하산소(下山所)로 삼았다. 여기서 일연은 선문을 전체적으로 망라하는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두차레나 개최했고 <삼국유사(三國遺史)>의 저술에 몰두, 완성시킨 후 여기서 입적했다.

3)빈우광(賓于光)=자상한 생몰연대는 미상이다. 고려후기의 문신으로 수성현에서 출생하여 문한관에 임명되었다. 그뒤 정동행성에서 실시하는 향시(鄕試)를 거쳐 동료 2명과 함께 원에 파견되었고 그기서 회시(會試)를 통과하고 정시(廷試)에 합격 원의 관직에 나가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그러나 곧 벼슬의 뜻을 접고 귀국하여 산림에 은거,현실 세계에서 이익과 영달을 구하지 않고 산수에서 스스로 즐기면서 생애를 마쳤다. 그의 필법은 당대에 이름이 높았다고 전한다.

5)박해(朴晐)=본관은 밀양, 충목왕3년(1347)에 밀직부원군 문숙공(文肅公) 중미(中美)의 차자로 출생했고 졸년은 미상. 호는 귀림(歸林)으로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에 이르렀으나 국사의 소란함에 벼슬을 사양하고 청주 계림(溪林)에 은거하다가 경산현 서면 내매촌(內梅村-현 수성구 신매동)으로 이거했다. 문평공(文平公)전백영(全伯英),예조판서공 이거(李琚),양정공(襄靖公) 박령(朴齡)등과 상교했다.

6)채순(蔡順)=생몰연대는 미상이며 수성현 출신이다. 그는 어머니가 죽고 늙고 병든 아버지가 살아계시기 때문에 어머니 묘에 여묘(廬墓)살이를 하지않았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죽게되자 3년동안 여묘살이를 하고난 뒤 그 다음해에 어머니 묘를 아버지 묘소 옆으로 이장을 하고 다시 3년간 여묘살이를 해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조선시대

1)손처눌(孫處訥)=명종8년(1553)에 태어나서 인조12년(1634)에 졸했다. 성주(星州)출신으로 본관은 일직(一直)으로 자는 기도(幾道),호는 모당(某堂)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장현광(張顯光)서사원(徐思遠)등과 교유하면서 학문과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임진왜란 후에는 대구향교의 재건에 힘쓰고 후진양성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정인홍(鄭仁弘0이 퇴계 이황을 배척하는데대해 척사부정(斥邪扶正)의 글을 써서 도내 살림의 규합에 힘썼다. 수성지역의 청호서원(靑湖書院)에 배향되었다.

2)손린(孫遴)=명종21년(1566)에 태어나서 인조6년(1628)에 졸했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자는 계진(季進),호는 문탄(聞灘)이다. 김우현(金宇顯)과 정구의 문인으로 장현광, 정경세 등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가졌다. 선조33년(1600)에 진사시에 합격한 후 1606년 문과에 병과로 합격하였다. 광해군 3년(1611년)이언적과 이황의 문묘종사를 둘러싸고 정인홍이 배척하자 손처눌과 함께 척사부정문(斥邪扶正文)을 지어 이를 비판하였다. 광해군7년(1615) 안동교수(安東敎授)에 제수되었고 3년후에는 예문관 봉교(藝文館 奉敎)를 거쳐 인조반정 후 예조좌랑겸 춘추관기사관, 병조좌랑, 단성현감 등을 지냈는데 치적이 훌륭하다는 평을 들었다. 인조5년(1627)정묘호란때 우복(愚伏)의 추천을 받아 의병장이 되었으나 난후에는 향리에서 학문에 전념하면서 장현광,김상용(金尙容)등과 교유하며 지냈다.수성지역의 봉암사(鳳巖祠)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는 문탄집(文灘集)이 있다.

3)김충선(金忠善)=1517년에 일본에서 태어나 왜장으로 임진란때 조선에 출전했다가 조선문화에 감화되어 귀화한 인물로 졸년은 명확치않다. 본명은 사야가(沙也加)로 수성지역의 우록동에 거주했다. 본관은 김해(金海),자는 선지(善之),자는 모하당(慕夏堂)이다. 임진왜란 때 좌선봉장(左先鋒將)으로 참전하였다가 조선의 문물을 흠모하여 경상좌병사 박진(朴晋)에게 귀순하였다. 그뒤 항복한 왜장들과 함께 의령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워 조정으로부터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고 도원수 권율,어사 한준겸(韓浚謙)등의 주청으로 김충선이란 성명을 하사받고 자헌대부에 올랐다. 그후 여진인의 침범으로 변방이 혼란하자 종군지원하여 10여년간 방수(防戍)하고 광해군5년(1613)에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제수되었다. 인조2년(1624)이괄의 난 때는 그 부장인 서아지(徐牙之)를 잡아죽인 공으로 사패지(賜牌地)를 받았으나 사양하고 이를 수어청의 둔전으로 사용토록하였다. 또한 병자호란 때에는 광주(廣州)의 쌍령(雙嶺)에서 150명의 군사를 이끌고 적과 싸워 대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칼을 던지고 통곡하면서“명이 우리를 도운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겠으며 금수와 같은 오랑케를 어찌 섬길 수 있겠는가. 춘추의 대의가 이제 끊어졌구나”하고 한탄하며 대구의 남쪽 우록리(友鹿里)로 들어가 살았다. 목사 장춘점(牧使 張春點)의 딸과 혼인하여 살면서 가훈,향약 등을 만들어 향리교화에 힘썼다. 그의 저서로는 모하당집(慕夏堂集)3권이 있다.

4)서섭(徐涉)=호는 남은(南隱)자세한 생몰년대 미상. 세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문종을 거쳐 단종에 이르기까지 벼슬은 대호군에서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그는 단종초에 왕족과 간신들의 발호를 경계하여 척간소(斥姦疏)로 개혁을 주장하다가 유배를 당하기도했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호를 남애(南涯)에서 남은으로 바꾸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은둔생활을 했다.

5)서감원(徐坎元)=서섭의 아들로 자세한 생몰연대 미상. 성종 때 성균생원으로 성종의 실정을 직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심한 고문을 당한 직신이다. 성종실록에도 상세히 기록돼있다.

6)양희지(楊熙止)=1439년에 태어나 1504년에 졸했다. 본관은 중화(中和)이며 자는 가행(可行),호는 대봉(大峯). 성종15년(1474)에 급제하여 임금이 기호일(圻號日)에 입시시켜 검열을 특별히 행하고 양(楊)은 희지(稀枝)가 귀하다면서 이름을 稀枝,자를 정부(禎父)로 하사했으나 뒤에는 왕명에 따르않고 처음데로 자와 이름을 썼다. 벼슬은 대사헌에 이르렀고 문장과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연산조에 임사홍(任士洪)의 참(斬)을 청하는 상소를 하여 무오사화에 연루된 선비들을 구했다.

7)이서(李漵)=1732년에 태어나 1794년에 졸했다. 본관은 덕수(德水),자는 계호(季浩),영조35년(1759),문음(門蔭)으로 입사하여 1776년,정조 즉위년에 대구판관으로 부임,신천의 범람을 막기위해 사재를 텅어 제방을 쌓아 백성들의 칭송을 들었다.

8)정필석(鄭弼錫)=생몰연대미상. 순조15년(1815)별은전(別恩典)으로 부호군을 제수받고 순조21년에 동지중추부사와 자헌대부 용양위대호군에 올랐다.

9)장자원(蔣自元)=생몰연대미상. 본관은 아산(牙山).감찰 우(芋)의 아들로 성종조에 사마에 올라 만성참군(萬城參軍)에 이르렀다. 덕행과 효행으로 사림의 칭송을 받았고 대덕산밑에 은거하였고 김종직과 의교가 있었다.

10)김수남(金守南)=본관은 경주 생몰연대미상. 초명은 애남(愛南),호는 우재(愚齋)며 이괄의 난때 공을 세웠고 인조병란에도 공을 세워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11)하시찬(夏時贊)=1750년에 태어나 1828년에 졸했다. 호는 열암(悅菴)으로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저서로는 <팔례절요(八禮節要)>2권과 <열암문집(悅菴文集)>이 남아있다. 자는 경중(敬仲),호는 달서재(達西齋)이다. 장여헌(張旅軒)과 숙부 채응린(蔡應麟)에게 수학했고 19세에 한강 정구(鄭逑)문하에서 문장이 대성했다.

임진왜란을 당해 팔공산에서 창의하여 화왕산성을 지켰고 난이 끝난 후 달서재로 돌아와 학문에 전념했다.

12)배영(裵泳)=본관은 성산.생몰연대 미상. 호는 공천(孔川)이며 홍매산(洪梅山)의 문인으로 효심이 돈독해 어머니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여 3일간 회생시켰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죽만 먹고 3년상을 마쳤다. 제삿날을 맞아 소리개가 날아와 제사상의 고기를 물고 가거늘 이는 자신의 불효탓이라며 가슴을 치고 통곡하니 소리개가 그 고기를 도로 물어다놓았다는 것이다. 조정에서 이 사실을 알고 효자정려를 명했다.

13)양달화(楊達和)=본관은 중화, 1694년에 태어나 1756년에 졸했다. 대사헌 양희지의 후예로 자는 태삼(泰三),호는 지촌(池村)으로 문행으로 향리에서 명망이 높았다.

14)두한필(杜漢弼)=두사충의 7대손으로 1823년에 태어나 1893년에 졸했다. 효행이 뛰어나 그의 사후 정려가 내려오고 종2품관직인 통훈대부규장각직각을 증직했다.

15)정동범(鄭東範)=생몰연대 미상. 본관은 청주,호는 노암(蘆庵)으로 벼슬은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올랐고 영조4년(1728)에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의병을 모아 성주목사 이보혁(李甫赫)과 더불어 합천에서 이를 격파하고 개선했으나 공은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와 은거했다.

16)정지언(鄭之彦)=정동범의 아들로 호는 면암(勉庵)으로 생몰연대 미상.조부상을 당해 아버지와 함께 시묘늘이를 했고 부친이 병환에 들자 단을 모아 별과 하늘에 기도하니 범이 개를 물어와 약에 쓰도록하였다는 것이다. 고종 29년(1982) 나라에서 이조참의를 추증하고 정효문(旌孝門)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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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편 수성의 인물 suseong 2011-07-21 0 1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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