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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편, 전설과 예악 2, 지명유래
suseong | 2011-07-21 17:12:01

2, 지명유래

♦범어동

범어동은 1450년 철원부사(鐵原府使)를 지낸 구수종(具壽宗)이 정착하여 마을을 일구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재 천주교범어교회가 있는 언덕은 남북으로 길이 400m가량되는 길다란 모습이 마치 한 마리의 커다란 고기와 같은 모양을하고 있고 고기의 입은 지금은 복개공사가 된 범어천을 향해 벌리고 있다. 꼬리는 범어시장의 서쪽 끝과 접하고있는 꼴이다. 옛날 범어천에 물이 많이 흐를 적에 마치 한 마리 붕어가 물위에 뜨있는 것같다고 해서 이곳을 고기 어(魚), 뜰 범(泛)이란 이름으로 불렀다고 전한다. 그러나 기록에는 “범어”란 한자를 “凡於”라고 쓰기도해 그같은 설명보다는 순수 우리말 지명을 이두식 한자로 표기했을 가능성도 없지않다. 이두식으로 표기했다면 확실히 그 뜻은 알 수 없으나 순수한 우리말로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도 천주교회가 위치한 이 언덕에는 아름다운 나무들로 숲을 이루고 있어 범어천이 복개가 되지 않고 맑은 물이 넘쳐흐르고 있다면 언덕의 숲을 감돌아 흐르는 냇가의 경관은 매우 운치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주일골(注日谷)

수성구청 남쪽 뒷산과 경신고등학교 뒷산 사이의 골짜기 이름으로 옛날에는 이 골짝이 너무 으슥해 낮에도 산적이 나와 행인을 괴롭혔는데 낮에도 산적을 주의해야한다는 의미로 그같은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그 옛날에는 이 곳이 땅이 저습해 산림이 울창했고 70년대에도 사람들이 많이 살지않았기 때문에 소도둑 들이 설쳤다.

♦장촌(張村)

법원 뒷산과 범어초교 사이의 골짜기를 따라 북으로 MBC방송국 뒤편에 자리잡은 마을로 일백여년전 인동 장씨가 마을을 이루었다고 그같이 이름 지었다고한다.

♦야시골

범어 네거리 북서쪽 지역인 범어2동 범어시민공원 지역을 일컫는 지명으로 6.25전쟁 무렵까지만 해도 동편은 공동묘지가 있었고 남편 골짜기엔 여우가 서식하면서 자주 나타난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밤자골

현재의 수성구청앞 대동교회 동쪽에서 북쪽으로 들어가는 골짜기이며 범어초교 뒷산 동쪽을 일컫는 지명으로 옛날 이 일대에 밤나무가 많앗다고 산이름을 밤자산, 마을 이름을 밤자골이라했다는 것이다.

♦배밀

현재 청구 정조아파트 부근으로 범어천 물길이 바뀌기전 범어동 2148번지 언덕 밑으로 냇물이 흘렀는데 이곳에는 항상 조각배 2-3척이 정박해서 이름을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다람뱅이

수성4가 북동쪽 신천 변전소 부근을 지칭하는 지명인데 본래 여기에는 범어천이 흘러 이곳을 돌아나가는 물굽이로 옛날에는 돌암뱅이라 부르던 것을 후대로 오면서 발음이 변화된 것이다. 물론 현재의 이곳은 수로변경으로 범어천의 흐름이 바뀌어 그같은 이름의 내력 ♦수통골

범어동의 남쪽 지역 자연부락의 하나로 과거 이곳에 수통샘이 있었다고 마을 이름을 수통골이라 불렀다.

♦수성동

조선조 당시 이곳은 대구부의 수성내현(壽城內縣)에 속했던 지역으로 수성들의 아래쪽에 위치한다고 하동(下洞)이라 불렀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하동은 신동과 합쳐 달성군에 편입되었다가 1938년 10월 1일 대구부의 확장개편으로 하동은 다시 대구부로 들어오게되었다.

수성동은 옛날 하동(현 수성1가)과 배일동(현 동구 신천동)사이의 넓은 들판으로 해방이후까지 거의 논밭으로만 이용되다가 5공화국이후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1948년 건국과 더불어 수성동은 대구시 동구에 편입되었고 1980년 4월 1일 대구시가 동구에서 수성구를 분구하는 과정에서 시조례1213호(1979년 8월 28일 공포)로 동구 신천 3,4동을 수성구로 편입함에 따라 수성1,2,3동에 이어 4동이 생겨나 현재에 이르고 있다.

♦중동

약 오백년전에 수성들에 형성된 마을로 당시엔 경주 이씨, 추계 추씨, 경주 최씨, 초계변씨가 살았다고한다. 그러나 행정구역의 소속은 당시와 많이 변했다. 1394년까지 수성현으로 있다가 대구현으로 바뀌었고 1910년에는 대구군에서 대구부로, 1914년에는 대구부에서 수성군 수성면으로, 1937년에는 다시 대구부로, 1963년에는 대구시 동구 중동으로, 1980년 4월 1일에는 대구시 수성구 중동으로, 1981년 7월 1일에는 대구직할시 수성구 중동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의 광역시 수성구 중동이 된 것이다.

♦상동

이곳은 대구 지역 뿐만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사람이 가장 일찍부터 살아왔던 지역으로 많은 선사유적을 갖고 있다. 약 5백년 전에는 수성평야에 경작하는 농민들이 가옥과 농막을 짓고 마을을 형성한 이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지역으로 진(秦)씨, 손(孫)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으며 지금도 이들의 후손들이 대구지역에 많이 살고 있다.

신천을 사이에 두고 남구 봉덕동과 인접한 이곳은 1394년 수성현에서 대구현으로 편입되었다가 1911년에 대구부로 편입되었다. 1914년 수성군 수성면으로 바뀌었다가 1937년에는 다시 대구부로 편입되었고, 그 뒤 동구 상동출장소 관내에 포함되었다. 1963년 1월 1일 동구 상동으로 분리되었고, 1980년 4월 1일 동구에서 수성구 상동으로 바뀌었고 1981년 직할시 승격과 그 뒤 광역시로 대구시의 명칭이 바뀌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참물샘

현재 상동지역의 광명 아파트 네거리 부근에는 수성못과 신천의 물이 불어나면 찬물이 저절로 솟아나는데 농사철에는 물이 너무 차워 농사에 지장을 주었을 정도여서 주민들은 이 일대의 물이 솟아나는 곳을 찬물샘이라 불렀다고 한다.

♦파동

예로부터 대구의 살기좋은 곳으로 “일파2무”란 말이 있는데 이는 첫째가 파동이고 둘째가 무태라는 뜻이다. 파동은 부채꼴 모양의 넓고 기름진 수성평야의 가장 남쪽 정점에 위치해 물산이 풍부하고, 법이산과 산성산 사이에 신천이 흘러 수세가 좋고, 수성못과 가창을 잇는 길은 상고시대부터 지금까지 전국적인 교통요로이며 경치 또한 뛰어나기 때문이다. 이곳의 이름을 과거부터 파잠, 혹은 파잠이, 파집으로 부른 것은 이 지역이 중국의 파촉지역을 연상되는 산세를 가졌기 때문으로 추측되며, 다른 이름으로는 수성봇부근에서 가창까지 길이 곧게 나있다고해서 “니리미”라고도 했다.

파동은 1914년 3월 5일 대구부 달성군 가창면에 편입되었다가 1958년 1월 1일 달성군에서 대구시로 편입되었다. 1980년 4월 1일에는 동구 파동에서 수성구 파동으로 바뀌었다.

♦서당골

파동의 법이산 쪽 골짜기에 중화양씨의 재실과 서원이 있는데 여기는 조선조때도 지역의 교육기관인 서당이 오래동안 운영되어왔기 때문에 서당골이라 불리웠다.

♦용두골

산성산에서 파동쪽으로 내려오는 넓은 골짜기를 일컫는 지명인데 이 골짜기를 이루며 북동쪽으로 내려오는 산줄기의 형상이 용의 머리를 닮았다고 용두골이라 부르고 있다.

♦두산동

두산동은 말뫼란 산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수성못을 둘러싼 산이름으로는 현재 법이산, 용지봉 등의 이름이 남아있으나 지산 범물 지역이 택지로 개발되기전에 용지봉에서 내려오는 산계곡을 따라 만들어진 저수지의 이름을 주민들은 말뫼못이라 불렀고, 문자로 표기할 때는 마산지(馬山池) 혹은 두산지(斗山池)라했다. 용지봉을 주봉으로 한 이 산을 전체로 부를 때 법이산이라 하기에는 적절하지않게 여겨지는 것은 봉수대가 위치한 산봉우리가 이 산의 서편에 치우쳐있고 이 산의 극히 일부에만 봉수시설이 있기 때문이다. 용지봉을 주봉으로 한 이 산 전체를 수성들판에서 보면 마치 커다란 말이 갈퀴를 늘어뜨리고 앉아있는 모습이다. 이같은 사실로 보아 이 산을 말뫼라했고, 말뫼 아래의 마을을 말뫼마을이라 했던 것을 일제가 지명을 한자식으로 바꾸면서 말두(斗), 뫼산(山)의 음을 취해 두산동(斗山洞)이라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일설에는 두산동은 말뫼를 독뫼와 함께 사용하는 지명으로 보고 독뫼가 두산으로 쓰여졌다는 것이다. 또 이 산의 뒤로 물이 넘어가므로 “물너미” 라 하고 벌판에 있는 산이란 뜻으로 불뫼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이름의 뜻을 살펴보면 독뫼는 수성들에서 보면 홀로 우뚝한 산이란 뜻으로 쓰여진 것같고, 물너미는 신천이 만들어낸 충적평야란 뜻으로 보이며, 불뫼는 수성들판에 있는 산이란 뜻인 것같다.

전설에는 아침 일찍부터 부녀자가 빨래를 하는데 앞에 가로놓인 산이 이동을 하다가 부녀자가 이 산을 쳐다보는 순간 산의 이동이 그 자리에 정지되어 우뚝하게 섰기 때문에 목뫼라하고 들판에 서있다고 불뫼라했다는 것이다.

이 지역은 조선조 때까지 대구부 수동면에 소속되어 있다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달성군 수성면에 소속되었고 1938년 10월 1일 대구에 소속되어 지금까지 대구에 속하게 된 것이다.

♦묵넘어

현 두산동 310번지 일대는 임진왜란 당시 현풍에서 피난온 사람들이 이룬 마을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 마을의 이름은 여기 오는 손님은 반드시 하룻밤을 묵어간다고 “묵넘이”라 하다가 그것이 세월이 흘러 “묵넘어”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마을이 오래된 것을 말해주는 증거는 마을안에 오래 된 감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새터

이 곳은 현재 두산동의 동사무소가 있는 마을로 묵너머에 살던 일부 주민들이 이주하면서 생긴 이름이다.

♦감나무정

두산동 일대에는 옛날부터 감나무가 많이 있어 그렇게 부르기도했다는 것이다.

♦불미(불뫼, 벌마)

두산동 일원을 들판에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벌마라 했으며, 벌판에 있는 산이란 뜻으로 불미라 했는데 새터는 웃불미에 속했고 그 중간을 중간불미, 아랫 쪽을 아래불미라 했다.

♦지산동

지산동의 유래는 두 종류가 있다. 그중 하나는 현재 녹원아파트와 능인중고등학교 자리가 못을 매웠던 곳인데 이 못의 이름을 둔덕지(屯德池)라 했고 이 못의 연원을 이루는 골짜기를 모산골(茅山谷)이라 했으며 둔덕지의 “지”자와 모산의 “산”자를 따서 지산동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 지역에 꿩이 많다고 1684년에는 수동면(守東面)치산리(稚山里)라 불렀는데 그 뒤 지금 범물동의 카톨릭 공동묘지가 조성된 산이 매의 주둥이를 닮았다고 해서 매봉이라 부르면서 꿩이 매에게 먹히는 신세라고 치산을 지산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전하는 얘기로는 1598년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선생이 경상감사로 재직하면서 모산골을 막아 둔덕지를 만들었는데 이 못에 물이 들어오지 않아 산허리를 가로질러 물이 고이게함으로서 농민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고한다. 정감사는 이같은 공로로 돌아가실 때는 용이되어 승천했다는 비문이 지금의 능인고등학교 교내에 세워져있었으나 6.25전쟁통에 파손유실되었다고한다. 벼슬을 그만두고는 이 못 옆에 영파정(迎波亭)이란 정자를 짓고 시와 노래로 만년을 보냈다고한다. 그후 지촌(池村)양달화(楊達和)가 이 곳에 야정(野亭)이란 정자를 짓고 살다가 이곳으로 중화양씨 일문이 옮겨살면서 마을을 이루었다고한다.

♦조일골=죄일골(朝日谷)

지산동의 동남쪽에 아침이 되면 가장 먼저 해가뜬다고 조일골이라 부르는 골짜기에 자연부락이 있었다.

♦모산골=못안골

녹원 아파트와 능인중고교가 있는 옛 둔덕지의 뒤편에 마을이 있었는데 이 마을을 못안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못안골이라 불렀는데 그 뒤 이 이름이 모산골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 마을에는 옛날에 벽진 이씨 성을 가진 부자가 살았는데 이 집에는 손님들이 많이 찾아와 그 집 며느리가 손님 오는 것을 싫어한 나머지 어느 시주 얻으려온 스님에게 손님 못오게하는 방법을 물었다고 한다. 그 스님은 모산골의 물길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돌리면 된다고 귀띰을 했고 그 집 며느리는 그에 따라 인부를 시켜 물길을 돌렸는데 과연 스님의 말데로 손님은 끊어졌으나 살림은 망했다는 전설이 있다.

♦무학산

현재 지산동의 양씨문중 재실인 무학재 뒤산을 무학산이라 부르는데 일설에는 이 산이 학이 나르는 모양을 하고 있다고 부친 이름이란 설과 평소 학이 많이 날아와 앉았기 때문에 지은 이름이란 설이 있다.

♦약시걸

지금은 없어졌으나 지산1동 사무소 앞을 흐르던 개울을 그렇게 불렀는데 거랑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약효가 있다고 약시걸이라 했다는 것이다. 특히 눈병에는 효험이 있었다고한다.

♦덕골

현재 목련 아파트 자리로 옛날 이곳에는 덕걸이란 절이 있어 그렇게 불렀다고한다.

♦자밧골=자박골=백전골(栢田谷)

현재 청구 호반맨션이 잇는 자리로 옛날 잣나무가 많이 심어진 곳이란 뜻으로 잣밭골이라 했던 것이 자밧골로, 혹은 자박골로, 혹은 백전골로 불리워지게되었다.

♦죽리(竹里)=중리(重里)

지산동 사무소의 뒷 마을을 대나무가 많이 심어져있다고 죽리라했다가 그 뒤 중리로 바뀌었다고한다.

♦범물동

마을 이름에대한 설은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곳은 대덕산과 용지봉이 이어지는 험한 산세와 깊은 골짜기를 끼고 있어 옛날에는 범이 많이 출몰했고 골짝 아래는 수량이 많은 샘이 있엇다고 범물이라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곳에는 70년대까지도 늑대가 나와 가축을 잡아먹는 일이 생길만큼 밤에는 다니기가 조심스러울 정도였다. 또하나는 용지봉을 중심으로 좌우로 이어지는 산능선이 한자로 무릇 범(凡)자의 모양을 하고 있고 용지봉 동편의 능선과 골짝의 모양이 말 물(勿)자의 모양을 하고있다고 범물이라했다는 것이다.

♦진밭골=수전=물밭

범물골짝에서 가장 높은 지역의 비스듬한 곳은 논이나 밭으로 부적합할 만큼 물끼가 많아 수전 혹은 물밭이라불렀고, 그 뒤 질척거리는 밭이라는 뜻으로 진밭골이라 불렀다.

♦가락골

진밭골 밑의 산골에 자리하고 있는 이 자연부락을 경치가 아름다운 골짜기의 마을이라해서 아름다울 가(佳), 골 곡(谷)이란 이름으로 가곡이라 하다가 나중에 이를 가락골이라 불렀다.

♦용지봉

범물동에서 남쪽 산을 보면 가장 높은 봉우리가 보이는데 이 봉우리 위는 평평한 평지로 되어있다. 전설로는 옛날 어느 때 큰 홍수가 나서 산이 대부분 물에 잠기고 용 한 마리가 피할 정도의 넓이인 이 봉우리만 남아있었고 용은 이 곳에서 홍수를 피했다고한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이 봉우리가 홍수를 피했던 용의 뿔 같다고해서 용지봉이라 했다는 것이다.

♦범바우들겅이=범바들게이=뱀다들거이

용지봉 아래로 급경사를 이루는 산줄기와 골짜기를 멀리서 보면 여성이 누워있는 형상이고 봉우리 아래 여성의 자궁에 해당하는 위치에 넓은 바위가 있고 그 바위에 숲이 자라고 있는데 숲이 무성한 해는 아래동네 여인들이 바람이 나지 않고 숲이 무성하지못하면 바람이 난다는 속설이 있어 이 곳을 그렇게 불렀다.

♦봉창바우=샘바우

용지봉 아래 범물쪽으로 내려가다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옆에 물맛이 좋은샘이 있다. 이 바위에는 큰 구멍이 뚫여 봉창바우라고 하는데 옛날 어느 장군이 화살을 쏘아 큰 구멍이 났다는 전설과 장군이 머리를 박아 구멍이 뚫였다는 유래의 전설도 있다. 그 바위 옆에 샘이 있다고 샘바위라고도 부른다.

♦장군바우

용지봉 아래 큰 바위에 장군이 쉬어 갔다고 붙인 이름이라한다.

♦황금동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하신 손처눌 선생이 이곳으로 옮겨와서 개척한 마을이다. 그 무렵 현재의 국립대구박물관 뒷산과 경북고 일대에는 푸른산이 애워싸고 있고, 수성들 쪽으로는 가을에 황금들판이 펼쳐진 지역이라하여 황청동(黃靑洞)이라 이름을 붙였다고한다. 1968년께는 수북면 황청리와 소지리를 포함한 행정지역이며 그 뒤 소지리는 소계동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황청동은 주민들이 저승을 뜻하는 황천동으로 잘못 발음하는 경우도 있어 이를 황금동으로 바꾸어줄 것을 대구시에 요청해 1977년12월1일 황금동으로 개칭하게되었다.

♦홈골

황금동을 황청동이라 부를 시절 이 마을의 수성들 지역에는 황금들판이 펼쳐지고 그 복판으로 지산동과 두산동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이 마치 넓은 판자에 홈을 파서 물을 흘려보내는 것과 같이 보였다고해서 이 마을을 홈골이라했다. 냇물이 흐르는 곳은 동대구로가 개설되면서 일부 복개된 상태다.

♦못안

우방신천지 아파트가 들어서기전 이 일대가 못이었고, 멀리서 보면 못 뒤편에 있는 마을이 못안에 들어있는 것처럼 보여 여기 있었던 마을을 못안이라 불렀다고한다.

♦밤마실(밤골)

지금의 황금네거리 동북편 아파트 지역은 옛날 야산이었는데 산의 모양이 밤송이 모양으로 생겼고, 산자락의 마을에는 많은 밤나무가 있어 이 지역을 밤마실 혹은 밤골이라 불렀다.

♦봉천(奉天)

지금 경북고등학교 자리는 냇물이 흐르지도 않고 수리시설도 없어 옛날에는 농사를 짓는데 하늘에서 비오기만 기다려 경작을 했다고 마을 이름을 하늘만 받들었다고 봉천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주봉리

밤골과 봉천 사이에 마을이 하나 있었는데 뒤산 봉우리의 생김세가 뾰죽하게 생겼다고 주봉리라 했다고 한다.

♦만촌동

이 마을은 임진왜란 무렵 옥천 전(沃川 全)씨가 처음 개척해 정착했고, 그 후 1650년경 달성 하(達城 夏)씨와 1810년경 달성 서(達城 徐)씨가 이주해오면서 마을이 크게 형성되었다. 지금 청기와 주유소 남쪽 구릉지에 위치한 이 마을은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일조량이 적은 바람에 벼농사가 늦어짐다는 뜻으로 “느지마을”“느지미”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 다른 얘기로는 이 마을에는 선비들이 많아 글공부에 열중하느라고 파종과 추수가 늦어졌다고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늦이”를 한자로 지잉(遲芿)이라 표기하기도 했지만 만촌(晩村)이라고도 표기해 “늦”이란 우리말 뜻과 마을을 부르는“이”라는 우리말을 붙여 그렇게 한자로 적었던 것이다. 이곳의 자연 부락명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두봉골(斗峯谷)

현 오성고교에서 대구산업정보대 서편 지역 마을을 가리키는 이름인데 지명유래로는 여러 설이 있다. 이 마을 뒷산 모양이 둥근 봉우리라고 해서 지었다는설과 두개의 봉우리가 마주보는 골짜기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불렀다는 설이 있다. 또 하가지 설로는 옛날에 홍수가 나서 대지가 모두 물에 잠기었는데 이 봉우리만 두루미 한 마리가 앉을 만큼 넓이로 남아있었다고해서 처음엔 두리봉이라 하다가 두봉골이 되었다고도 한다. 이 마을은 음지에 있다고“음지마을”이라고도 했다.

♦지장골(智章谷,地藏谷)

2군사령부에서 남부정류장으로 가는 골짜기로 이름의 유래는 두가지 설이있다. 하나는 현재 개미마을과 AID아파트가 있는 곳으로 들판이 길다고 지장이라 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옛날 이 지역에 지장사(地藏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그렇게 불렀다는 설이다. 이와 관련 AID아파트가 있는 자리는 옛날 못이있었는데 이 못 이름을 지장못이라했다는 것이다. 이 곳에는 옛날에 지장서당이란 서당도 있었으며 이 마을의 주된 성씨는 능성 구(陵城 具)씨였다.

♦각계골(覺界谷)

옛날 달성군과 경산의 경계 지역이라해서 경계를 깨닫는다는 뜻의 각계 혹은 경계 지점이란 뜻의 지계(支界)란 이름을 붙인 현 영남공고에서 서한아파트에 이르는 골짜기를 말한다. 임진왜란 당시 동래정씨가 처음 정착하여 개척한 마을이며 서한아파트 자리에는 각계지란 못이 있었다.

♦담티고개

남부정류장에서 동쪽으로 가다보면 현 고가도로에 이르러 고개를 넘게되는데 이 고개 주변의 산들이 담처럼 둘러싸고 있다고 담티고개라고 했다는 설과 이 고개에 당나무가 있었다고 당터고개라 했던 것이 담티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다.

♦암자골(남작골)

담티고개에서 북쪽편 골짜기를 일컫는 지명으로 일명 남작골이라고도 한다. 이 곳에는 옛날에 암자가 있어 그렇게 불렀다는 설과 임란때 대구에 와서 살게 된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죽고 여기에 묻히면서 남작골이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뱀골

현 2군사령부 부근의 골짜기의 지명으로 이곳에는 옛날에 뱀이 많이 있었다고 그렇게 불렀다는데 지금도 2군사령부 안에 있는 못의 이름을 사동못(蛇洞池)라한 것도 그 때문이다.

♦무등산

현 초원아파트가 있는 지역을 그렇게 불렀는데 동대구역 철로를 지나 현재 진로아파트 자리까지 뻗은 산세를 총칭한 것으로 명절날 동네 아녀자들이 밝은 달을 벗삼아 춤을 추었다고해서 그렇게 불럿다고한다.

♦쉬일목

동부정류장에서 대구MBC쪽으로 가다가 처음 나타나는 고개에 돌무더기를 쌓아놓고 기원을 하는 처낭이 나오는데 이곳에는 숲이 둘러싸고 있어 행인들이 쉬어가는 곳이라해서 쉬일목이라했다. 쉬일목에는 나거네와 동네 처녀 사이에 얽힌 슬픈 사연의 사랑이야기도 있다.

♦두루(방)산=두류산

법원과 대구MBC뒷산을 두루산 혹은 두루방산이라하고 한자로는 두류산(頭流山)이라 한다. 또 쉬일목 뒷산을 작은 두루방산이라하고 이 산은 큰 두루방산이라고도 하는데 산이름을 두루산 혹은 두루방산이라하는 것은 생김세가 두리두리하게 생겻다고 그렇게 불렀던 것같다.

♦바리곧에골

효목도서관에서 구 통합병원 사이에 작은 산능선 아래로 골짜기가 있는데 이 골짜기를 그렇게 부른다. 이 골짜기를 통해 능선에 오르는 길이 바로 오르는 길이란 뜻을 담고 있어 이름지은 것이다

♦샘골

태백공사 앞에 샘이있었는데 이 샘으로 인해 이 지역을 .샘골이라 했다. 이 샘은 금호강물이 말라도 마르지않을 만큼 수량이 풍부했고 가뭄에도 걱정이 없을 정도였으나 도시개발로 이 샘이 없어졌다.

♦고산동(孤山洞)

고산이란 지명이 처음 생긴 것은 일제하인 1914년 경산군 서면이 고산면으로 개칭되면서인데 이같은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은 그 지역에 유명한 고산서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고산 서당은 조선조 명종 때 성동마을에 사는 지방 유학자 윤희겸선생이 후학교육을 위해 서제를 세우고 퇴계 이황선생께 서제의 이름을 간청한 바 고산(孤山)이라 했고 이 곳에 퇴계선생의 글이 남아있다.

♦시지동(時至洞)

이 지역에 있었던 조선조 때의 관립숙박시설인 시지원(時至院)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이 원(院)은 조선조 당시 국내 주요간선 도로의 일정 지점에 만들어진 것으로 주로 공무상의 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했고 이 원에는 운영관리를 위한 관원을 두고 비용조달을 위한 전답을 제공했다. 시지원은 부산-청도-경산-대구-서울을 잇는 간선도로에서 경산지역에 설치된 원이었고, 당시 대구와 경산간의 통로는 대구성의 남문에서 신천을 건너 지산동을 거쳐 지금의 월드 컵 경기장 부근에서 고산지역의 시지원 지역을 거쳐 경산읍내에서 남성현을 넘었는데 먼 길을 여행하는 나그네는 이 시지원에서 묵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월동(沙月洞)

이 마을은 약 370년전 김해 김씨 일족이 개척했는데 마을 뒤 울창한 나무 아래로 시냇물이 흐르고 시냇가에는 흰 모래가 달밤이면 너무나 아름다워 사월이라 이름지었다는 설이 있다. 또하나의 지명 유래로는 이 마을을 개척한 김해 김씨 할아버지의 묘소 옆에 큰 돌이 네 개 놓여있어 처음에는 사돌(四乭)이라하다가 세월이 흘러 사월로 바뀌었다고한다.

♦욱수동(旭水洞)

이 마을은 약 5백년전 경원이란 선비의 아버지가 처음 개척했는데 당초에는 현 욱수천의 상류에 위치해있다고 상동이라하다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개편 때 이 곳의 냇물이 맥반석 자갈위로 흘러 너무 맑고 깨끗해 햇살에 빛난다고 욱수동이라 했다는 것이다. 욱수골은 총6Km에 달하는 깊은 계곡인데 이 계곡의 서쪽에는 느리, 참새, 명인골, 선돌 등이 있고 골 서쪽에는 까꾸랭이, 범둔골, 망월골 등이 있고 남쪽에는 봉암마을이 있다. 관내의 자양산(紫陽山)은 흔히 자산(紫山 또는 子山)이라 부르기도하는데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박응성이 주도하여 성을 쌓아 지금도 그 성터가 자산성이란 이름으로 남아있다.

♦노변동(蘆邊洞)

고려시대에 의성김씨 일족이 이 마을을 개척했는데 마을 주변에 갈대가 욱어진 곳이란 뜻으로 갈변동이라 부르다가 일제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을 하면서 갈대밭 가장자리의 마을 이란 뜻으로 노변동으로 고쳤다는 것이다. 이같은 유래는 근래의 사람들의 입에의해 전해지면서 와전된 감이 없지 않는 것은 갈대가 욱어진 마을의 언저리에 있다는 뜻이었다면 처음부터 한자말로 노변동이 맞고, 노변동으로 이름을 바꿀 당시 갈변동이라 불렀다면 마을 개척기에 칡넝쿨이 무성하다가 뒤에 갈밭으로 바뀐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처음 지명은 갈변동(葛邊洞)이 아니었을까.

♦매호동(梅湖洞)-우산(牛山)

이 마을은 본래 매화나무가 많았고 주위에 못들이 산재해 있어 마을개척기에는 현재의 경부선 부근인 북쪽에 먼저 마을이 생겨 매화마을이라 하다가 남쪽으로 안동네가 생기는 바람에 새로 생긴 동네를 내매(內梅)라했고 북쪽의 본동을 외매(外梅)라했다. 그러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고치면서 이 외매마을과 접경하고 있는 우산(牛山)마을을 합쳐 매호동으로 고쳤다. 우산이란 지명은 매호동 가운데로 매호천이 흐르고 동네 뒷산이 암소가 송아지에게 젖을 먹이는 형상이라 하여 우산이라 했다는 것이다.

♦성동(城洞)

이 마을의 뒤산을 성산이라하고 이 산에는 삼국시대에 토성을 쌓았던 흔적이 있고 임진왜란 때도 성을 쌓아 왜적을 막았던 곳이며 여기는 성산봉수대가 설치되어 하양봉수에 응했던 유래로 성동이라했다. 이 곳에는 1850년대에 진용백이란 분이 행자정이란 이름으로 상점을 열어 행자정마을이라 부르는 동네가 있었고, 고산서원이 있는 곳의 마을을 서원마을이라했는데 1914년 이 두마을을 합쳐 성동이라 했다.

♦신매동(新梅洞)

외매마을의 안쪽에 새로 마을이 생겨 외매라했는데 외매 마을 부근에 흐르던 욱수천이 서쪽으로 흐르다가 동쪽으로 물길이 바뀌는 바람에 서쪽에 새로운 땅이 생기고 여기에 아산장씨들이 동네를 개척하면서 동네이름을 새터 즉 신기(新基)라했다. 1914년 일제의 행정지역개편 당시 내매마을과 신기마을을 합쳐 신매동이라 했다.

♦배내, 이천동(梨川洞)

1600년경 김해김씨 일가가 이 마을을 개척했는데 범물,지산,황금동과 경계로 하고 있으며 이 지역 자연부락으로는 안골,배내,새청,안뜸,윗재인골,아랫재인골 등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그가운데 마을앞에 흐르는 냇가에 배나무가 많이 심어져있어 배내라했던 마을을 대표적으로 선택해 이 지역 전체를 1914년 행정지역 개편 당시 한자식 표기로 이천동이라했다.

♦송정(松亭)고개

현 고산2동사무소 부근 고개를 송정고개라 부르는 것은 옛날 이곳이 울산서 경산을 거쳐 대구로 오는 길목인데 소나무 숲속에 정자가 있었고 이 정자에 행인들이 쉬어갔다는 것이 지명의 유래이나 지금은 솔숲도 정자도 없다.

♦새청

이천동 지역 골짜기에 깊은 샘이 있었는데 샘이 얼마나 깊었는데 연실 한꾸리가 다 들어갔다고 이 샘을 “연골샘”이라 하고 골짜기를 “연골”이라 불러오다가 그후 샘이란 발음만 살려 샘천으로 부르다가 지금은 새천이라 하고 있다.

♦팔현동(八峴洞)

파크호텔을 넘어 철로변에 위치한 이 마을은 조선조 초기에 전백영(全伯英)이란 선비가 개척했는데 그 후손들이 선조의 산소에 향나무를 심었더니 나뭇가지가 팔자(八字)모양으로 쳐진데다 이마을이 고개밑에 있다는 뜻으로 팔현이라 이름지었다는 설이 있다. 지금도 이 묘소에는 팔자형의 향나무가 있다. 또 하나의 설은 이 마을이 옛날에는 고모령을 넘어 산속 깊이 위치한 오지 마을이기 때문에 고개를 여듧 구비를 넘어야 들어올 수 있다고 팔현마을 이라 했다는 것이다.

이 마을 옆의 백등산(白燈山)에는 금호강에 먹이감을 찾아 날아온 백로가 하얗게 모여들어 흰 언덕이 생긴 것같아 흰덤, 또는 흰서미라고도 부르고 있고 이 지역은 철새보호구역이다.

♦가천동(佳川洞)

고모역의 동쪽 시지동과 경계에 있는 마을로 남으로 펼쳐진 들판으로 골짝 마다 맑은 물이 흐르는데 옛날에는 장뚝못(장태못)에서 가장 수량이 많았고 수세가 좋아 농사에 좋고,사람 살기 또한 좋아 아름다울 가, 내천, 마을 동을 붙여 가천동이라 했다는 것이다. 한때 이 마을 북쪽에는 고을 원이 살았다고해서 원당골(員堂谷)라고 불렀고 지금도 집터가 남아있으며 말을 메었던 자리를 말미골이라 부른다.

♦대흥동(大興洞),내환동,내곶(內串)

대흥동은 행정동명으로는 내환동으로 통용되어오다 주민들이 내우외환이란 말과 닮아 어감이 좋지않다며 개명을 요청해와 2002년에 현재의 지명으로 바뀌었다. 이 내환동은 옛날부터 내곶이라 적고 주민들은 “안곶이”라고 부르던 것을 행정착오로 곶(串)자와 한자가 비슷한 환(患)자로 바뀌면서 잘못 개칭된 것이다. 곶은 땅의 형세가 돌출된 곳을 부르는 우리말인데 이곳의 지세가 돌출된 때문에 안곶이라했고 그와 대칭되게 돌출된 현재의 삼덕동을 외곶(외곶) 혹은 밭곶이라 불렀다.

이 마을의 이름은 고려 현종(1034)때 문충공 연재선생이 이 곳에 묵어가면서 동민들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곡기(谷己)란 이름을 지어주어 그렇게 불러오다가 1914년 일제의 행정개편 당시 속명으로 써오던 내곶으로 개칭했다고 한다.

월드 컵 축구경기와 유니버시아드대회가 열린 국제경기장인 월드 컵경기장이 이곳에 있다.

♦삼덕동(삼덕동), 외곶(外串)

약3백년전 밀양박씨 일가가 개척한 마을인데 앞서의 안곶이와 대칭되는 외곶으로 불러오다 1914년에 삼덕동으로 고쳤다. 이곳 역시 마을 옆으로 흐르는 강과 산이 강쪽으로 돌출하고 있어 외곶이라했다.

♦덕천(德川)

대덕산 아래 흐르는 좋은 물이란 뜻으로 덕천이라했다.

♦연호동(蓮湖洞)

이 마을은 조선조 인조(1635)때 제갈문몽(諸葛文夢)이란 선비가 개척했는데 이곳에다 못을 만들고 연꽃을 심어 마을 이름을 연호동 혹은 연지동이라 불렀다고한다. 이곳은 지금도 많은 못이 산재해 있고 수초들이 자라고 있지만 옛날에는 홍수가 지면 금호강 물이 이곳까지 들어와 온통 벌판이 호수처럼 보이는 늪지대가 되고 여기에 연꽃이 피면 매우 아름다운 풍경이 돼 연호지 이름에 걸맞게된다는 것이다. 이 연지를 중심으로 윗마을을 연지, 아랫마을을 하연지하고 그밖에 자연부락으로 안뜸,아랫마실등이 있다.

♦도장(陶場)골과 도장지

연호동에서 고모동으로 가는 길목에 양지바르고 흙이 좋아 옛날에는 옹기그롯을 구워파는 옹기굴이 있어 이 지역을 도장골이라 불렀고, 옹기재료인 흙을 판 자리에 농업용수를 저장해 못으로 사용하면서 이 못을 도장못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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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편, 전설과 예악 2, 지명유래 suseong 2011-07-21 0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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