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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역사와 변천  3, 조선시대
suseong | 2011-07-21 17:03:54

3, 조선시대

조선조 들어서도 고려 이래의 기존체제를 존중해 대체로 8도의 편성으로 일관했으나 감영은 개국초 경주에 있다가 세종초부터 상주로 옮겨 임란까지 존속되었고 전쟁이 끝난 직후 전략적 중요성이 인식된 대구로 옮겨지게 되었지만 현의 수령은 임명되지않았다. 조선조 들면서 감무가 있었던 수성현은 태조3년에 대구에 영속시켰고 그 이듬해는 경주에 이속되는 곡절을 겪었다. 그러다 태종14년(1414)에 다시 대구에 합쳐져 수성지역은 경주와 대구에 번갈아 편입되면서 독자적 행정구역으로서 위상을 상실한다. 그뒤 세종 원년(1419)5월에 대구현이 군으로 승격되면서 수성지역도 다시 현으로 위상을 회복하고 대구의 속현이 되었다. 이같이 행정적 위상이 높아진 것은 지역의 발전에 따른 현상으로 <경상도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대구군과 속현인 수성,하빈,해안 등3현의 호수는 총1,249호 ,인구는 남녀 총8,629명으로 기록돼있다. 대구지역은 수성권의 수성평야, 달성평야,해안평야가 있어 농업생산이 풍부했던 것이다.

이같이 대구권이 발전함에 따라 세조12년(1466)정월에는 대구군을 도호부로 승격했다. 당시 수성현의 영역은 <경상도지리지>에 의하면 “동쪽으로는 경산현의 경계 범적현(凡積峴)까지 11리 100보,남쪽은 청도군의 경계 팔조현(八助峴)까지 거리 27리 130보,서쪽은 성주 임내 화원현의 경계 감물천(甘勿川)까지 12리 10보,북쪽은 대구군의 경계 금용교(金龍橋)까지 거리 5리 233보”라 했다. 동쪽 경계인 범적현은 과거 대구와 경산 고산의 경계였던 지금의 범물동의 땅고개일 것으로 추측되며, 팔조현은 지금의 팔조령이고, 서쪽 경계인 감물천은 최근까지 감삼못 등이 있었던 지금의 성당동 일대인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감삼못과 성당못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냇물이 여러 다른 작은 물줄기와 합쳐 지산동에 이르러 낙동강에 흘러들어가는 작은 내의 이름을 옛날에는 감물천이라하고 그 일대를 감물천방이라했기 때문이다.

교통로는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으로 도로망이 퍼져나갔는데 도로의 크기에 따라 대,중.소로로 구분하였고,도로를 따라 역,원,참 등의 시설을 만들었다. 당시 대로는 넓이가 56척,중로는 16척,소로는 11척으로 만들었다. 전국에는 서울과 개성,죽산,직산,포천 등을 잇는 4대로와 이 4대로와 연결되는 중로가 만들어졌고,이 중로와 변방지역간에 연결 지워지는 도로는 모두 소로였다. 대구는 서울-죽산(竹山)간의 대로를 거쳐 죽산(竹山)-상주,진천(鎭川)을 지나 상주 낙원역(洛院驛)에서 선산의 여차리참,칠곡의 동명원현,대구,오동원,팔조령,청도등을 거쳐 동래-부산까지는 중로로 연결되었다. 현재의 칠곡에서 팔달교부근을 거쳐 대구의 약령시옆을 지나 범어동 지역에서 가창 오동부근에서 팔조령을 넘는 길이다. 역시 앞산의 산성산과 파동의 법이산이 만드는 협곡을 따라 팔조령을 넘는 만큼 수성구지역에 중요한 교통로가 놓여있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죽산-대구 수성-동래 부산간에는 교통로가 중로였지만 세종조에 삼포개항으로 인해 왜인들과의 무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중요성이 높아졌다. <고사촬요(攷事撮要)>에 의하면 서울에서 부산포로 가는 중로가 대구부를 지나게 돼있었으며 대구부에는 왜사(倭使)를 향연하는 곳도 마련했다고 한다. 이같이 대구부가 대왜관계에서 중요성을 가지게 되면서 그 관문격인 수성지역도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의 역제는 대체로 고려시대의 역제를 답습해 역에는 역장, 역리,역졸을 두어 역의 행정을 담당케했고 몇 개 내지 몇 십개의 역을 하나의 도(道)로 묶어 역승(驛丞=종9품), 또는 찰방(察訪,또는 程驛察訪=종6품)을 두어 역무를 관장케했다. 이들 찰방은 역무 외에도 교통로상의 지위를 이용해 지역의 정보수집 및 보고를 통해 지방방백의 동태를 감시 감독하는 민정업무도 아울러 수행했다. 태종,세종시대에는 거의 대간이나 정랑직에 있는 유능한 조신들을 파견했던 것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도별 역수가 경상도에는 11도 158역이 설치돼 경상도가 전국에서 가장 많았고 찰방도 11개소로 최고였다. <세종실록지리지>,<대동여지승람>등에 의하면 대구에는 범어역이 성현도(省峴道)소속 찰방역이었으며 이 역은 대구도호부 청사에서 9리 지점에 위치했고 이 역의 동쪽 25리에는 경산 압량역이 있었다. 이 역 남쪽 55리에는 청도 오서역(鰲西驛)이, 서남쪽 30리에는 화원현 설화역이,북쪽 27리에는 성주 임내 팔려현 고평역(高平驛)이,서쪽 37리에는 하빈현 금천역(琴川驛)이 있엇다는 것이다. 이같이 당시의 범어역은 대구를 중심으로 사방에 뻗어있는 교통로의 중심에 위치했으며 대구가 점차 군사,경제 도시로 성장함에 따라 그 역할도 첨차 커져 인근 여러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로의 심장부 역할을 했다.

이밖에 역과는 달리 행여자의 숙식을 제공하는 기관으로 원(院)을 설치했다. 대구에는 모두 8개소의 원이 있었는데 부청사 남쪽 3리에 낙중원(洛中院), 30리에 오원(梧院),34리에 마천원(馬川院)등 3개소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들은 수성지역에 있었거나 인근에 소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 원은 조선후기로 오면서 모두 없어지고 주점이나 여점으로 대체되었다.

한편 긴급한 통신수단으로는 봉수(烽燧)를 이용해는데 종류별로는 모든 봉수가 집결되는 서울 남산의 경봉수,국경지대의 급한 일을 알리는 연변봉수, 이같은 국경의 연변봉수를 서울의 남산 중앙봉수에 전달해주는 내지봉수(內地烽燧)가 이었다. 대구에는 법이산(法伊山)과 마천산(馬川山)등 2개소에 내지봉수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법이산 봉수대는 수성지역에 소재한 것이다. 법이산 봉수대는 제8간봉(間烽)으로 김해지역의 웅천(熊川)에서 봉수를 올려 김해,밀양,청도를 지나 이 봉수대에 이르고 여기서 경산 하양을 통해 영천 성황당 직봉에 연결했다. 당시의 지명에 따른 코스를 보면 “천성보(웅천 간봉)-성화야(이하 김해)산성-자암-백산(이하 밀양)-남산-성황-분항-남산(이하 청도)-북산-법이산(대구)-성산(경산)-시산(하양)-영천 성황당(직봉)”으로 돼있다.

조선조 초기 수성지역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았을까. <세종실록지리지>와 <경상도지리지>에 의하면 총 264호에 1,348명(남644,여704)으로 기록돼있고 이는 대구본현인구( 총436호 2553명)의 절반을 넘는 수준이다. 이들의 성씨를 보면 토성이 고려이전부터 있었던 빈(賓),나(羅),조(曺),혜(嵇)씨 등 4성씨가 있었고, 그 시기에 이곳으로 옮겨 살았던 성씨는 유(柳),장(張),최(崔),신(申),유(劉),고(高),정(鄭)씨등 7개성씨가 있었으며,이전 호적에는 없어 언제부터 살게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새롭게 등록된 성씨는 예(芮 부계),진(陳 계성),최(崔 보령),김(金 김해, 청도),이(李)씨 등의 성씨로 이들은 모두 향리(鄕吏)였다는 것이다.

경제상황을 보면 수성지역을 구분해서 기록한 자료가 없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대구군의 전체상황은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와있다. 대구군의 농지면적에대해 “간전수는 총6,543결이며 이중 수전(水田)은 3/10강”이라 한 것을 보면 대구가 신천과 낙동강을 끼고 있으면서도 수리시설이 발달되지못해 논면적이 전체 농지의 30%수준 밖에 안되고 이는 낮은 토지생산성을 말해준다. 이를 인구수로 나누어 보면 앞서 통계로 계산해서 장정1인당 약1.5결인데 이는 경상도 전체평균 1.7결보다 적어 대구의 경제력이 다른지역에 비해 뒤떨어져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빈부차이도 상당히 심해 문종때 전 대구군수 이보흠(李甫欽)이 임금께 진언하면서“대구에는 거실(巨室)의 농장이 많다. 그래서 빈민들이 부호가의 사채에 의존하여 실업 유리하는 자가 있다.”고 했을 만큼 토호와 부농의 토지겸병현상이 심해 하층민의 생활이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수성지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같다.

한편 수리시설로서 제언을 보면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대구지역에 성당(聖堂),불상(佛上).둔동(屯洞),부제(釜堤)등 4곳에 불과했고 이중 수성지역에는 둔동 1곳에만 제언이 있었다. 그후 예종원년에 편찬한 <경상도속찬지리지>에는 4곳 외에 18곳의 이름이 더 기록돼있는데 그중 수성지역에는 둔동제(수성 東聞山里소재)를 포함해 광청동제(光淸洞堤=광청동소재),장제(墻堤=枝只誓里소재),병정자제(竝亭子堤=注谷里소재)등 4곳에 제언이 있었다. 이외에 공력이 적게 들고 대규모로 관개할 수 있는 보(洑=川防)는 16세기부터 보급되어 대구에는 무도 32개소에 실설이 되었고 이 가운데 수성지역에는 11개소가 있었다.(대구읍지)

한편 수성지역의 공산물로는 조선전기에 대구에는 2개소의 도기소(陶器所)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이 지역의 남촌상원동(南村上院洞)에 있었다고 <경상도지리지>에 기록돼있다. 이 문헌에는 대구지역 전반에 걸쳐 양잠이 성행했고 특히 수성현의 농산물로는 벼,기장,마,조 등을 많이 생산했다고 한다. 또 수성현의 토산 공물로는 과류(果類)에 당추자(唐楸子)황율(黃栗)전서(全黍)를,모피류로는 장피(獐皮)를,약초로는 당귀(當貴)백편두(白篇豆)송자인(松子仁)을,기타로 입초(笠草)를 기록하고 있다. 당시 수성지역의 특산품으로 노루가죽을 생산했다는 사실은 신기하게 여겨진다. 이들 토산 공물은 임금에게 진상한 것들이다.

수성지역의 교육기관으로는 대구군에 있었던 대구향교인 관학에 의존하는 한편 지금의 수성구 성동에 위치한 고산서당(孤山書堂)이 이미 1633년이전에 설립돼 가장 오래된 사학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조 후기에 와서도 지역에서 교육과 학문의 중심역할을 하는 서원과 사(祠)를 민간에서 설립했다. 청호서원(靑湖書院=숙종20년 1694,부동20리 守東面,현 수성구 황금동)오천서원(梧川書院=영조20년 1744, 부북 20리 上守西,현 수성구 파동)봉암사(鳳巖祠

=정조23년 1799,부남 10리 下守西 현 수성구 상동)옥계서원(玉溪書院=정조22년 1798,부남30리, 현 가창면 대일동)녹동서원(鹿洞書院=정조 15년1791,부남40리 上守南,현 가창면 주동)등의 기관들이 그것이다. 이들 교육기관은 성종조이후 대구주변 각지역에서 김종직(밀양),김굉필(현풍),정여창(함양),이황(예안),조식(삼가)등의 대학자들이 배출됨에 따라 이 지역의 유생들이 연고에 따른 수학의 기회를 가지게 되면서 설립된 것이다. 퇴계의 문도인 한강 (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배운 손처눌(孫處訥)서사원(徐思遠)정사철(鄭師哲)곽재겸(郭再謙)유요신(柳堯臣)채몽연(蔡夢硯)등이 대구출신의 대표적 학자로 활동했고,퇴계 문인으로 대구로 이거한 예안 출신의 이숙량(李叔樑)과 파잠(巴岑=파동지역)에서 후진양성에 힘쓴 전경창(全慶昌)등의 노력으로 문풍이 진작되고 사림이 크게 성장해갔다. 이같은 학풍의 진작과 함께 수성지역의 인물로는 세종조에 조윤성(曺允誠),조극흡(曺克洽)부자가 과거에 급제해 출사했고,나홍서(羅弘緖)가 관찰사를 지냈다.

한편 임진왜란시기의 수성지역민들은 대구,경북이 전국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정황에 비추어 왜군의 침략통로에 면해있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다. 수성지역에는 小西行長이 주장으로 이끄는 1번대의 병력 1만8천7백명이 1592년 4월14일 부산포에 상륙함으로써 한반도에 가장 먼저 침략의 발길을 들이놓은 뒤 파죽지세로 북상해 1주일만인 21일에 대구성을 함락했다. 이때 왜군은 부산포 점령에 이어 16일에는 기장과 좌수영을 함락하고 17일에는 양산,18일에는 밀양과 청도를 거쳐 대구를 침범했다. 이들의 대구 침략로는 청도의 팔조령을 거쳐 가창과 파동을 지나 감영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대구에서는 수성지역이 가장 먼저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이때 대구에 들어온 왜장과 병력은 肥後宇土 성주 小西의 병력 7천명외에 宗義智(대마도부중 성주)의 5천명,松浦鎭信(平戶島 성주)의 3천명,有馬勝信(島原 성주)의 2천명,大村喜前(大村 성주)의 1천명,五島純玄(福鴻 성주)의 7백명 등이다. 왜군의 점령과정에서 대구읍성은 모두 파괴되었고,대구부사 윤현(尹晛)은 관내의 백성들과 군인 2천여명을 이끌고 공산성으로 피했고 이때 미처 피하지못한 백성들은 엄청난 참상을 겪었다. 그뒤 대구는 북상하는 왜군의 안전통로와 병참보급 기지 역할을 하게되었고 毛利輝元이 이끄는 제7번대가 수비를 담당하면서 豊臣秀吉의 조선친정에 대비해 이곳을 행궁으로 사용하기위한 준비를 맡았다. 선조26년 명나라 원병과 이순신장군이 이끄는 수군의 승리,전국각처에서 일어난 의병등에의해 왜군이 패배하면서 그해 5월15일 왜군은 대구에서 퇴각하고 대신 명나라군대가 주둔하게되었다.명군의 참장(叅將)李寧이 군마 1천을 이끌고 들어온 다음 부총병(副總兵) 劉挺이 군병 5천명을 주둔시켰다. 대구에서 이들 역시 군량을 확보하는 등 병참역할을 장기간 수행했다.

이같은 전란속에서 수성지역은 폐농상태가 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주민들도 거의 사망할 만큼 극심한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정유재란시 왜군은 퇴각하면서 공산성을 공격 함락시켰고 대구에 저장된 군량을 노린 왜군과의 격전, 왜군과 명군, 조선군의 내왕과 전투등 으로 전국8도 가운데 경상도지역의 피해가 가장 혹심했다고 적고 있다. 주민들은 왜군에게 코를 잃은 사람,아내와 누이가 능욕을 당한 사람,살륙당한 사람이 엄청났고, 심지어 명군의 제물이 되기도하였으며 동족의 악한 무리에게 참변을 당하기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전후 7년간의 전쟁속에서 경작을 제대로하지못해 굶는 사람이 속출해 사람끼리 잡아먹는 사태가 벌어지기도했다. 실록에는“경상도 6진관(鎭管)가운데 동래,대구 등 6읍은 이미 탕폐되었고 인민은 거의 죽었다. 오직 안동 1읍만이 겨우 보전되어 경내에 사람이 많았다”고했다.

임진란 당시 대구지역에도 의병활동이 있었으나 그 기록이 자세히 남아있지 않아 전모를 알 수 없다. 다만 팔공산을 중심으로 한 의병회맹, 비슬산을 중심으로 한 우배선의 의병활동이 전해지고있는 것으로 보아 수성지역에도 이와 관련된 일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수성지역에서 우배선 장군이 벌인 유격전으로 전란 이듬해인 계사년 정월에 청도에서 넘어오는 왜적을 가창골인 오동원(梧桐院)부근에서 매복했다가 물리쳤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특히 대구에는 왜적의 대부대가 주둔해 있었기 때문에 의병활동이 쉽지않았을 것으로 보이나 부산과 동래에서 대구까지 오는 왜적의 주된 이동통로이면서 험한 산악지대인 가창지역이 의병전의 무대가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정묘-병자 양호란은 전란의 범위가 주로 한강유역에 국한되었기 때문에 대구,수성지역에는 별영향이 없었으나 임란 당시 왜군으로 조선에 귀화해 수성지역에 살았던 김충선(金忠善)이 병자년에 호병의 침략소식을 듣고 광주(廣州)쌍영진(雙嶺陣)에서 적을 크게 무찔러 공을 세웠다.

이같은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대구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이 부각됨에 따라 선조34년(1601년) 경상도의 감영이 최종적으로 대구에 정착됐고 선조23년에 완성된 토성이 왜란으로 파손된뒤 영조12년(1736)에는 석성이 축조되었다. 이렇게 대구부의 행정적 지위가 강화됨에 따라 수성지역은 완전히 대구권에 흡수되었다.

대구부의 위상이 강화된 조선후기 이 지역에 부 임한 판관 가운데 수성지역과 관련,특기할 인물은 판관 이서(李漵)다. 정조 즉위년(1776년)에 부임,3년간 재직한 그는 대구부이(府治)로부터 5리 떨어진 수서면(守西面)과 동상면(東上面)에 걸쳐 흐르는 냇가(현 신천)에 방천을 축조해 상습적인 홍수피해를 방지한 업적을 남겼다. 신천의 홍수 범람을 방지하는 것이 역대 수령의 주요임무 중 하나였는데 이서는 사재를 털어 신천가에 10여리에 걸쳐 제방을 쌓아 범람의 피해를 막았던 것이다. 대구지역 백성들은 그의 공적을 기려 이 제방을 이후언(李侯堰),이공제(李公堤)라했고 지금도 그를 기리는 비가 신천가 상동지역에 세워져있다.

한편 대구는 도호부로서 행정적 위상을 굳히면서 숙종10년(1684)이후 고정된 영역을 갖게됐는데 이 때 이전의 수성현은 6개면으로 나뉘어지고 이들 면은 35개 리(里)로 구성되었다. 수현내(守縣內)=3개리,수북(守北)=7개리,수동(守東)=7개리,상수서(上守西)=4개리,하수서(下守西)4개리,상수남(上守南)=10개리였다.현재 고산 지역은 당시 경산군에 속해있었고 경산은 모두 5개면으로 구성돼있었고, 고산지역에 해당하는 서면(西面)에는 14개리가 있었다. 그러나 고산지역은 선조34년(1601)경산현이 대구부에 속하면서 대구부 부동면(府東面)되었다가 6년뒤 경산이 현으로 독립되자 경산현 서면이 되는 등 변동을 겪었다.

조선후기의 교통 통신 상황은 전기와 대체로 비슷한 형편이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대구부를 통과하는 도로는 소로로 규정하고 있으나 <증보문헌비고>에는 전국의 긴요한 도로를 9대로로 명시하고 이 가운데 대구를 통과하는 2개 도로를 삽입해 교통망에서 대구의 중요성을 드러내고 있다. 부산에서 유곡을 거쳐 서울로 가는 길과,통영에서 유곡을 거쳐 서울로 가는 길이 그것인데 이들이 모두 대구를 지나가고 또 수성지역을 통과하고 있다. 이는 군사적 행정적 면에서 국경과 서울 사이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역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두 도로중 서울-용인-죽산-진천-문경-상주-칠곡을 통과하는 길은 <속대전>에서 규정한 중로를 통해 대구도호부로 진입하는 길이고,서울-광주-이천-음성-충주-문경-상주-칠곡을 통과하는 길은<만기요람>에서 기록하고 있는 경상좌도로 연결하는 길이다. 대구도호부로 들어오는 도로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동안 동명원현(東明院峴)에서 칠곡의 우암창(牛岩倉)을 경유,금호강을 건너 대구에 이르렀고 거기서 수성지역인 오동원을 경유,팔조령을 넘어 청도군으로 연결되었다. 금호강을 건너 대구로 진입하는 도로는 현재의 원대동 방면이었던 것같다. 원대에서 현 달성공원 앞길을 통해 대구부의 서문으로 가서 그기서 다시 등겨전 골목,떡전 골목 등을 거쳐 남문에 이르렀던 것이다. 원대(院垈)는 원이 있었던 곳으로 보이며 장소로 보아 당시 대로원(大櫓院)이 있었던 곳으로 짐작된다. 이 대로원은 금호나루에서 강을 건널 때 여행객에게 숙식을 제공했던 곳으로 보인다. 등겨전 골목,떡전골목 등은 당시 “서울 내길”이라 불렀던 것을 보면 이 길이 서울로 가는 도로였음을 말해준다. 당시 남문은“영남제일관문(嶺南第一館門)”이라 하여 대구의 출입문에 해당됐고 그곳에는 종루가 있어 지금의 종로는 그에 연유한 것이다. 남문에서 지금의 반월당 네거리를 거쳐 현 대구초교 서편도로를 지나 대봉동,봉덕동을 경유, 신천을 건너 현 중동,상동,파동과 가창지역을 통과해 팔조령을 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대구지역으로 도로로 수성지역과 관련있는 도로로는 두개의 노선을 들 수 있다. 하나는 대구부 남문-하수서-수현내-수북-경산 코스로 오늘날의 대봉동-중동교-중동-상동-지산동(땅고개)을 경유 경산군으로 가는 길이다. 또 하나는 대구부 남문-하수서-상수서-각북 코스로, 대구부 남문에서 파동까지 간선도로 연결되는 2개 대로가 지금의 가창면 용계동에서 갈리어 현 가창댐을 지나 정대동에 이르고 다시 청도군 각북면을 지나 통영까지 가는 도로다. 대구부에는 나루가 4개소 있었는데 신천을 건너는 나루는 검정진(檢汀津)하나 밖에 없었다. 여행객에 숙식을 제공하는 원(院)은 순조 33년(1833)에 편찬한 <대구부읍지>에 의하면 대구 전지역에 걸쳐 수성지역의 오동원 하나 밖에 없었고, 이 원은 남쪽으로는 청도 오서참(烏棲站)과 40리 거리였고 북쪽으로는 칠곡 고평참(高平站)과 50리 거리에 이었다.

대구에는 조선후기에도 수성지역에는 범어역 하나 뿐이었고, 이 역은 이미 보았듯이 대구 경산간의 도로에 이용하기 위해 설치했지만 그 길목인 지금의 봉덕동,중동,상동,지산동과는 거리가 상당히 떨어진 범어동에 소재해 여행객의 편의에는 문제가 있었다. 범어역에는 큰말1필,중말 2필, 적은 말 10필 등을 보유하고 있었고,이 역의 경비를 조달하기위해 66결95부4속의 농지를 주었다. 조선 후기에도 법이산 봉수는 가덕도 천성보에서 처음 일으켜 김해,밀양,청도로 연결되는 8번째 감봉으로 역할을 했는데 여기서 경산의 성산(城山)에 통보 영천의 성황당 주봉에 연결시켰다.

조선후기 수성지역의 인구를 보면 1789년의 호구통계로는 지금의 수성지역에 해당하는 수북면(守北面)2,098명,수동면(守東面) 1,392명,수현내(守縣內)1,100명,하수남(下守南)1,710명,상수남(上守南)1,146명,상수서(下守西)1,036명,하수서(下守西)950명이다. 당시 대구의 총인구는 61,477명(13,413호)으로 그 때의 도심권인 동상면(桐上面)과 서상면(西上面)에 집중해있었고, 도심권이 아닌 곳은 시장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몰려 살았는데 수성지역에는 수북면의 범어장과 하수남면의 오동원장에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이 지역의 동족부락으로는 인천 이씨의 마을이 가장 컸고,신천리에는 월성 이씨가 많이 살았다고한다.

한편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수성지역은 19세기에는 많은 수리시설이 이루어졌고 대구권 94개소 가운데 이 지역이 46개소나 되어 대구 경북권에서 가장 수리안전 시설이 많은 농지를 가지고있었다. 당시의 면별 제언을 보면 수북면=판교제(板橋堤)사동제(蛇洞堤)지계제(枝界堤)범어제(凡於堤)주곡제(注谷堤)지장동제(志藏洞堤),수동면=황청제(黃靑堤-둘레 405척)황청제(黃靑堤-둘레 852척)조곡제(照谷堤)곶계제(串界堤)둔동제(屯洞堤)대보(大洑),상수남면=보당제(奉堂堤)주동보(蛛洞洑)전지보(田地洑)상보(上洑)중보(中湺)하보(下洑)사척보(沙斥洑)신보(新洑)양동보(良洞洑)지장보(地藏洑)삼천보(三千洑),하수남면=원형제(元亨堤)지치제(地h사정보(抱祠亭湺)휴암보(鵂巖洑)매하보(梅下洑)동하보(東下洑)냉천보(冷泉洑),하수서면=삼정동제(三丁洞堤)산대제(山大堤)지계제(地界堤)해동제(解東堤)매작동제(매작洞堤)사평제(沙坪堤)사설보(沙偰洑)지인보(知印洑),내수현면=유보(柳洑)덕토보(德吐洑),상수서면=정대보(亭垈洑)당산보(堂山洑)가전보(家前洑)유곡보(楡谷洑)하을오평보(河乙吾坪洑)제인당보(濟人塘洑)등이다.

이같이 수성지역의 농업경제는 발전된 반면 19세기 들어 낙동강의 주운의 발달과 함께 대구장이 번성하면서 지역의 상업은 쇠퇴했고 이전까지 성시를 이루었던 범어장(수북면)과 오동원장(하수남)은 폐장되고말았다.

한편 문화적으로는 이 곳이 농경지역이 었던 만큼 농경문화가 발달했는데 고산지역의 이른바“고산농악”과 “욱수농악”은 다른 지방의 것과는 뚜렷히 차별화되는 농악으로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고 특히 고산노악은 대구시 무형문화제 1호로 지정돼 있다. 이밖에 수성지역의

농요로는 모심기노래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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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역사와 변천  3, 조선시대 suseong 2011-07-21 0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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