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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역사와 변천  2. 고려시대
suseong | 2011-07-20 15:56:27

2, 고려시대

918년 왕건의 고려건국이후 936년 고려에 의한 후삼국통일까지 고려와 후백제 신라가 정립해 있던 시기의 수성지역은 수성군이 대구현,화원현,하빈현등을 영속하고, 고산지역이 편입 돼있는 장산군은 해안현을 거느리고 있었다. 후삼국의 통일전쟁은 신라를 복속시키는 것이 핵심적 전략과제이기 때문에 당시의 수성군 과 장산군 지역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가 삼국의 승패를 가름하는 각축장이 된 것이다. 후백제 견훤과 고려의 왕건이 동화사 근처인 이른바 동수에서 접전을 벌인 동수대첩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이 싸움에서 왕건이 대패하고 겨우 목숨만 부지해 달아나면서 대체로 현재의 동촌 지역, 반야월 지역,고산지역, 수성구 지역, 앞산지역을 경유해 피신했던 점을 생각해 보면 당시 수성지역민이 얼마나 전란에 시달렸을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같이 후삼국의 통일전쟁 와중에서 고려와 후백제 세력의 각축으로 혹심한 고통을 겪어온 수성구 지역은 신라의 패망으로 정치적 입지가 약화된데다 한때 후백제를 지원했던 지역이란 정치적 약점등을 배경으로 고려초 군현제도 정비에서 그 위상이 약화된다. <고려사>에는 고려초에 수창군을 수성군(壽城郡)으로 이름을 고쳤고 지리지에는 현종9년(1018)에 수창군을 종래 양주(梁州=신라의 良州)관내에서 동경(경주)유수관의 관내 속읍으로 바꾸면서 군의 영현이었던 대구현도 상주목 경산부(성주)로 내속(來屬)시킨 것이 그것이다. 한편 현 수성구 고산지역은 당시 장산군으로 수성군과 함께 동경(경주)유수관에 속하게 되었다. 이는 수창군에서 대구를 분리시켜 각각 다른 행정관내의 속읍으로 만들어 상주외관(常駐外官)이 없는 향리층이 다스리는 지역으로 등급을 낮춘 것인데 수성지역은 고려시대가 거의 끝날때까지 이같은 정치적 입지로 남게된다.

그러나 수창군의 행정구역상 격하가 이르나기까지 잠정적으로 과도기를 겪은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사정은 <경상도 지리지>의 수성현조에 나타나고 있다. “고려시기에 수성군으로 개칭하였으며,언전(諺傳)으로 가창도호부(嘉昌都護府)라고한다.”,“또 강등하여 감무(監務)로 삼았다. 그 승강의 연대는 알 수없다.”,“영종(靈宗)때 수성군사를 계림부에 예속시켰다”,“공양왕 경오년에 해안현을 겸하여 감무를 두었다.”고 기록한 것이 이를 시사한다. 비록 민간의 속언이지만 수성군이 강등되기 전에 도호부의 위상을 가지고 있다가 감무의 감독을 받는

위치로 전락하고 마침� 계림부에 예속되고 나중에는 속현의 위치에 있던 해안현과 같은 등급에서 겸임감무의 감독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창도호부의 언전에대한 일부 학자들의 견해로는 고려 건국초에 각 지방에 도호부를 설치했었던 사실과 가창군은 대구현 등 4개의 영현을 두었던 주현이었고 가창이 전략적 군사요충지였을 것으로 보아 신빙도가 높은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신라의 주군-영현의 체제가 고려시대에 와서 대읍 중심의 군현제도로 전환화기까지에는 과도적 단계가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고 그러한 사례가 수성군의 경우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전으로 기록된 것은 잠정적으로 그같은 체제를 갖추었다가 본격적인 개편을 단행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고려가 건국 초기 후삼국 통일전쟁과정에서 수성군의 군사 전략적 위상을 중시하고 도호부를 설치했을 것으로 보는 까닭은 이곳이 신라의 수도인 경주와 후백제의 진출로인 밀양 김해등과 연결되는 관문과 같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교통로는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계속된 것이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대구읍치”부분에 ‘수성고현’과 남창(南倉)등을 경유하여 ‘팔조령’을 넘어 청도에 이어 경주에 이르는 길을 자세히 그려놓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이 지도에는 청도,풍각,창녕 등지로 연결되어 있는 도로와 수성을 경유하는 대구로를 서로 연결시켜 놓았으며 또 이 길의 옆에 있는 성불산에 산성을 그려

놓았고 성불산과 법이산 사이에 가창천을, 법이산과 팔조령에 각각 봉화대를 그려놓았다. 이는 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수성지역이 청도 풍각 창녕방면과 경주 등지로 진출하는 교통의 요지이면서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해왔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렇게 수성지역은 고려초 한 때엔 도호부가 설치될 만큼 행정적 위상을 가졌지만 고려의 정치적 안정에 따라 본격적 행정체제 정비가 시작되면서 대구현이 떨어져나가는 등 영역이 축소되고 동경유수관의 속읍이 되는 위축된 상황을 맞게된다. 그후 125년이 지난 뒤 인종21년(1143) 대구현은 현령관이 파견되는 등 행정적 승격을 가져온 반면 수성군은 공양왕2년(1390년) 감무가 파견되었다가 결국 독립된 행정단위로 존속하지못하고 대구에 합속되기에 이른다.

한편 고려시대의 교통로는 육지에는 역참(驛站)과 물길에는 조창(漕倉)제도를 두었는데 수성지역에는 수로는 없었고 육로의 역으로는 대구지역의 대표적 역인 범어역이 있었다. 그리고 역과 역 사이에는 참(站)을, 요로나 인가가 더문 곳에는 원(院)을 두었는데 수성지역에는 오동원(梧桐院)이 있었다. 그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범어역참은 대구부 동쪽9리에 있었다고 전하고 있어 현재의 범어동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오동원은 대구부의 남쪽 30리에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현재의 가창 오동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려가 권력의 부패와 왕권의 약화로 쇄퇴의 길을 걸으면서 무신정권이 들어선후 농민봉기가 심화될 무렵 수성지역을 포함한 대구권도 이같은 혼란에 휩싸이게되었다. 신종5년(1202)10월에 신라부흥을 명분으로 경주의 별초군이 봉기했을 때 부인사,동화사 승려들이운문의 농민군과 합세해 영주(영천)을 공격했다. 당시 무신 집권자인 최충헌은 이같은 경주지역의 반군을 진압한후 동경유수를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강등시키고 안동도호부를 대도호부로 승격시키는 한편 경주관내의 주,부,군,현과 향,부곡을 안동과 상주에 분할 예속시켰다. 그리고 경상도의 명칭도 상진안동도(尙晉安東道)로 바꾸어 이 지역의 재봉기를 막고자했다. 이 때 수성지역도 행정적 위치가 약화되고 중앙정부의 감시를 받는 지역이 되었다.

몽고의 침략기인 고종18년(1231)부터 46년(1259)까지 약30년간에도 수성지역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몽고군은 총6차에 걸쳐 11회의 공격을 감행했는데 수성지역은 2-3차 침략 때는 약간의 노략질을 당했으나 6차침략 때(1254-1256)는 가장 큰 고통과 참상을 겪었다. 6차공격은 車羅大의 주력부대가 경상도 일원을 휩쓸었다. 기록에는“백성들은 세가 궁하여 사자들은 해골을 묻지못하며 생자는 노예가 되어 부자가 서로 의지하지못하고 처자가 서로 보존하지못한다”,“제도군현(諸道郡縣)의 산성(山城)과 해도(海島)에 입보한 자들을 모두 출육(出陸)케할 때 공산성(公山城)에 입보한 백성들이 굶어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고 적어 대구권의 당시 참상을 알려준다. 당시에 부인사와 동화사가 불타고 초조대장경이 소실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수성지역은 당시의 교통로로 볼 때 몽고군이 문경-상주-낙동-상림-범어-대구 경로를 거쳤을 것으로 짐작돼 극심한 피해를 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고려말의 왜구(倭寇)에의한 침입과 피해도 이만저만이아니었다. 고종10년(1223) 고려시대들어 처음 침입했던 왜구는 공양왕4년(1392) 진압되기까지 169년간 총529회나 침입했다. 이 가운데 대구경북은 총 54회의 내침을 당해 경남,경기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침입을 받았다. 기록상 대구와 수성지역이 직접 공격을 당한 것은 우왕8년(1382)6월과 이듬해7월 두차례였다 그러나 대구인근의 경주3회,청도1회,성주1회,경산1회,김천1회,영천4회의 침입을 받았을 때도 주력이 아닌 왜구들이 대구 수성지역에도 출몰했을 가능성도 있다.

당시 피해를 적은 권근(權近)의 <영해부서루기>(寧海府西樓記)에서“왜구가 일어나고부터는 날로 쇄체하더니 신유년(우왕7년 1387)에는 그 화가 더욱 격렬하였다. 성과 읍은 폐허가 되고 여염은 불타버렸다. 두어해 동안을 적의 소굴이 되게 버려두니 관리들은 다른 고을에 가서 붙어 살고 범과 산돼지는 옛마을에 와서 날뛰었다.”고 한 것을 보면 당시의 수성구 지역의 참상도 짐작된다. 수성지역의 경우는 <고려사절요>권31에 전하는 수성(守城=壽城)인 조희삼(曺希參)과 경산(성주)인 배중선의 딸,영산인 신사천의 딸 등에 얽힌 “3인절효”의 이야기가 당시의 상황을 말해준다. 조희삼은 어머니와 피난중 왜적을 만나 어머니를 해치려는 적의 칼날을 몸으로 막아 먼저 죽은 효자였다.

고려시대 수성지역민들은 13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무신집권과 더불어 교종세력이 쇄퇴하고 선종세력이 등장하면서 가지산문의 부각과 함께 비슬산을 중심으로 한 불교활동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이미 이 곳은 신라 때 관기와 도성 두 성사가 있어 종교적 성지로 알려졌고, 특히 도성이 수도한 도성암 아래에는 절을 지었는데 상당한 영험이 있어 고려 성종 원년(982)에 아미타신앙을 바탕으로 한 결사조직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중시한 일연이 이를 삼국유사에서 전하고 있다.

비슬산은 역사적으로 다양한 신앙형태가 공존했던 곳으로 신라통일기에는 화엄10찰 가운데 하나인 옥천사가 있었고, 혜감에게 수학한 바 있는 백련사의 2세인 천인(天因)이 머문 바 있었다. 이곳에서 가지산문을 중흥한 일연이 1227년에서 1248년까지 22년간을 보내면서 사상적 경향을 형성했던 만큼 이곳에 접해 있는 수성지역민들은 지배적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일연의 비문에는 그의 행적이 이렇게 적혀있다.

“정해년(1227)에 승과에 응시하여 상상과(上上科)에 올랐고 그 뒤 포산(비슬산)의 보당암(寶幢庵)에 머물면서 마음을 선의 관조에 두었다. 병신년(1236)가을에 병란이 있어(중략)다음해 여름에 다시 이 산에 있는 묘문암(妙門庵)에 있었더니 암자의 북쪽에 무주(無住)라는 난야(蘭若)가 있어 스님이 곧 전일의 기억을 되살려 이 암자에 머물렀다.(중략)원종5년(1264)가을에(중략)얼마 아니있어 인홍사(仁弘社) 강주 만회(萬恢)가 스님에게 강주자리를 양보함에 학도가 운집하였다.(중략)스님이 인홍사의 주지로 11년이 되었는데 창건된지가 너무 오래되어 전우가 모두 쓰러지려 하며 또한 땅이 습하고 비좁아서 스님이 다 거듭 새롭게하여 넓혔다. 이어 조정에 상주하여 인흥사(仁興社)라 개명하니 왕의 친필로 액호를 써서 내렸다. 또 포산의 동쪽 기슭에 있는 용천사(湧泉寺)의 지붕을 다시 이어 불일사(佛日社)라하였다.”

이상에서 보이듯 일연은 비슬산에 위치한 보당암,묘문암,무주암,인홍사,용천사에 주석하면서 이 지역민의 불교신앙 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고려는 불교국가이면서 과거제 실시와 더불어 유교를 받아들이고 후기로 올수록 관료들을 중심으로 한 유교가 성하게 되는데 수성지역에도 유력한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고 있다. 수성지역에는 빈(賓),나(羅),조(曺),혜(嵆) 등 네 종류의 성씨가 토성으로 살았는데 고려의 급제자 명단에는 賓于光이 올라있다. 그는 원의 압제시절 원의 제과에도 급제하여 한림에 임명되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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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역사와 변천  2. 고려시대 suseong 2011-07-20 0 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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